(부산=NSP통신 허아영 기자) = [편집자 주] 월간문학(月刊文學)이 全日신문 동경특파원을 지낸 시인이자 수필가 월포(月浦) 박정희 선생의 인생 스토리를 담은 에세이 ‘그리운 시절 마이 러브 마이 라이프’를 발간했다.
박 선생은 이 책 속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 얽힌 그의 가족사를 통해 두 나라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 속에 지내왔다는 것을 작게나마 알리려는 노력을 담았다.
당사는 비록 작은 개인사, 가족사에 불과할지라도 결국 작은 가족사들이 모여 한 나라의 흐름이 결정되지는 않을까 하는 저자의 마음을 담아 이를 연재한다.
[구슬치기 대장(후편)]
구슬도 잃고 친구들의 믿음도 잃은 나는 완전히 혼자가 되어 집으로 가는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늘 책보 안에서 짤그랑거리던 구슬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홀로 세상 끝에 버려진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갑자기 눈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에 주먹으로 눈을 비볐다. 손등 위에 한가득 물기가 번져 있었다.
참 이상하게도, 집으로 가는 내내 손등 위에는 무언지 모를 짭짤한 물기가 마르지 않았다.
와신상담이라 하였던가. 그날의 치욕적인 패배 이후, 나는 얼마간 친구들과의 구슬치기 시합에 끼지 않았다.
친구들은 한 판이라도 좋으니 같이 놀자며 나를 붙잡았지만, 이미 나에게 있어 구슬치기는 놀이가 아니었다. 이미 말했거니와, 명예가 걸린 일이었다. 나는 다만 구슬치기하는 아이들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만 보았다. 특히나 말남이의 구슬치는 모습에 집중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말남이의 뒤통수가 찌릿할 정도로 두 눈을 이글거리며, 말남이를 이길 방법을 연구하고 또 연구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말남이를 비롯해 모두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비책을 발견하였다. 그야말로 대단한 발견이라 할 만했다. 다른 친구들은 단지 구슬을 직선으로 튕기는 법만 알 뿐이었다. 지금까지는 나 역시 그랬다.
그러나 이제는 달랐다. 나는 엄지손가락을 구슬 밑에 바짝 붙여 넣어 밑에서 위로 힘을 주어 튕겨 구슬이 장애물을 뛰어넘는 방법을 고안해 냈던 것이다. 가볍게 날아오른 구슬이 포물선을 그리며 장애물을 넘어 상대방 구슬을 적중시킬 수 있도록, 나는 밤새도록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 후 며칠 동안, 호롱불 밝힌 내 방에서는 딱딱 구슬 부딪히는 소리가 늦게까지 흘러 나왔다.
노력 앞에 장사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나는 그 말이 옳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다시 구슬치기 시합에 나선 나는 인정사정없이 친구들의 구슬을 따 모았다. 내 구슬은 마치 날개라도 달린 양 아이들의 눈 앞을 휙휙 날아다녔다. 밤새 갈고 닦은 새로운 기술을 본 아이들은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말남이 역시 공중을 날아다니는 내 구슬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했다. 결국 말남이에게 넘어갔던 구슬은 다시 본래 주인을 찾아 돌아왔다. 내게 구슬과 왕좌를 동시에 넘겨준 말남이는 지난날 내가 그랬듯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도 다시 내 편에 붙었음은 물론이었다.
연전연승을 거듭하는 동안, 내 방에는 다시 옥구슬이며 쇠구슬이 가득해졌다.
그야말로 구슬 부자였다.
사천 남양면 전체에서, 구슬치기에 있어 나를 따라올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나는 예전처럼 거들먹거리거나 으스대지 않았다. 그랬다가 도전자에게 밀린 뼈아픈 경험은 한 번으로 족했다. 구슬치기를 잘 하고 싶어 하는 같은 학교 동생들에게 친절하게 그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방과 후 운동장 한 구석에는 나의 구슬치기 단기 강좌가 열리곤 했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그날도 학교 공부가 끝난 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놀던 짓궂은 친구 하나가 문득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 저기 창고에 가서 우윳가루 좀 먹지 않을래?"
솔깃한 얘기였다. 당시 학교 뒤쪽 창고 옆에는 커다란 우윳가루통이 잔뜩 쌓여 있었다.
미국에서 어린이들을 위해 보내 준 구호품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한 사람 앞에 먹을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먹고 싶은 만큼 풍족하게 먹을 수는 없었다. 안 그래도 구슬치기에 열중하다 보니 배도 출출하던 참이었다. 친구의 얘기를 듣고 보니 고소하고 달큼한 우윳가루가 더더욱 먹고 싶어졌다.
결국 함께 구슬치기를 하던 나와 몇몇 친구들은 학교 소사에게 들키지 않으려 몸을 숙이고 살금살금 창고 옆으로 갔다. 처음 제안했던 친구 녀석은 미리 준비해 온 뾰족한 쇠막대기 끝으로 두꺼운 우윳가루통을 쑤셔 작은 구멍을 냈다. 그 모습이 벌써 여러 번 해 본 듯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그 친구를 필두로, 우리는 차례차례 우윳가루를 빨아 먹었다. 내 차례가 되어 우윳가루를 빨아 먹었더니, 몰래 먹는 맛이 또 기가 막혔다. 그러나 들키지 않으려 작게 뚫어 놓은 구멍에서 나오는 우윳가루는 양이 너무 적었다. 조금이라도 더 먹고 싶었던 나는 젖 먹던 힘까지 내어 힘껏 가루를 빨아들였다.
"정희야! 정희야! 괜찮아? 응?"
"야, 넌 이게 지금 괜찮은 걸로 보이냐!"
"조용히 좀 해! 소사 아저씨한테 들키며 우리 다 끝장이야!"
온 목구멍과 콧구멍이 우윳가루로 꽉 막힌 나는 숨이 넘어갈 듯 기침을 해 댔다.
그 와중에도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진정하려 했지만, 기침은 쉬이 그치지 않았다. 친구들은 당황하여 내 등 쓸어주랴 누가 오지는 않는지 살피랴 허둥댔다. 가슴이 답답하고 눈물 콧물이 줄줄 나왔다. 순간,
"이 놈들! 또 우윳가루 훔쳐 먹고 있지? 오늘이야말로 몽땅 잡아서 혼을 내 주마!"
소리 난 쪽을 바라보니, 아니나 다를까 소사 아저씨가 전속력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들켰다! 잡히기 전에 빨리 도망가야 돼!"
우리는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잽싸게 달려 담을 뛰어넘고 뒷동산으로 도망쳤다. 기침을 해대던 나도 언제 그랬냐는 듯 친구들과 함께 날듯이 달아났다. 역시 나는 무언가를 몰래 먹을 팔자가 아니었다. 현장에서 잡히지 않으면 먹던 게 목에 걸려 고생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 정직하게 살 운명이었던 것이다.
다시 구슬치기 이야기로 돌아가, 그 뒤로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누구에게도 구슬치기 왕좌의 자리를 내 주지 않았다.
20년 전, 고향에 내려갔을 때 나는 오래 동안 만나지 못했던 말남이의 소식을 들었다.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얻은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했다는 소식이었다. 지난 추억에 잠겨 말남이의 동그란 얼굴을 떠올리니, 안타까움에 목이 메어 왔다. 말남아, 우리 언젠가 다시 만난다면, 어여쁜 옥구슬 유리구슬 치며 어린 시절 그때로 돌아가 보자꾸나. 보고 싶다.
nsplove@nspna.com, 허아영 기자(NSP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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