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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 중국 일본 차문화계의 큰 별 금당(錦堂) 최규용(崔圭用)

NSP통신, 최상훈 기자, 2013-01-22 14:33 KRD7
#최규용 #한국 #금당 #차문화 #뿌리

한국과 중국의 차계가 본격적으로 교류를 하게 된 것 전적으로 그의 개척에 힘입은 바 커

NSP통신-고 금당 최규용선생
고 금당 최규용선생

[부산=NSP통신] 최상훈 기자 = 2013년, 올해는 한국 차문화계의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금당(錦堂)최규용(崔圭用 1903~2002)선생의 타계11주년이 되는 해다.

꼭 백수를 누린 장수 차인이자 우리 차계의 최고 공로자이며 한중일 차문화계의 큰 별이었던 금당선생의 맑고 소박한 차향은 지금도 부산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더하고 있다.

[차와의 설레는 첫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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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은 1903년 통영에서 태어나 작고할 때 까지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의 활동 범위는 국내에 한정되지 않고 일본과 중국을 어우렀으며 특히 한국과 중국의 차계가 본격적으로 교류를 시작하게 된 것도 전적으로 그의 개척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이 한국 차계의 평가다.

중국과 국교가 수립되 전 중국에 들어가 한국의 차를 알린 이가 그였고 국교가 수립된 후에도 꾸준히 차 문화 교류 운동을 통해 양국 차계의 인연을 튼튼히 한 것도 그였다.

금당을 흔히 다성(茶星,차계의 큰 별)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중국 차인들이 붙여준 별호다.

그가 차와 첫 인연을 맺게 된 사연은 그가 남긴 노작 (금당다화)에 잘 소개되어있다.

이에 따르면 금당은 유학생 신분이던 1920년(18세)에 일본의 한 여관에 가게 되었다.

여관의 안주인이 과자와 더불어 노리끼리한 물 한잔을 주었는데 마셔보니 시큼털털한 맛에 냄새가 고소하고 은근히 구미를 돋우어 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아무리 마셔도 물리지 않을 것 같은 이 차는 금당에게 생활의 반려자가 되었다.

여관에서 우연히 얻어 마신 한잔의 차가 그의 일생을 관통하는 화두가 되고 삶의 방향을 결정 짓는 필연이 되었던 것이다.

이미 차를 즐기고 있는 다우들에게 내는 한잔의 정성스런 차도 소중하지만 차의 맛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 내어주는 한잔의 차가 얼마나 큰 의미를 띨 수 있는지 되새겨 보게 만드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금당 최규용은 한평생 차를 즐기며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차 정신(茶 精神)으로 살다가 2002년 4월 5일 청명(淸明)날 부산 송도바다가 보이는 금당다우에서 백세로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부산차인연합회장(釜山茶人聯合會葬)으로 치러졌고 사리 36고를 수습했다.

유골은 유언대로 통영의 선산에 뿌려졌다.

[중국차와의 인연]

일본의 여관에서 맛본 한 잔의 차가 금당을 당대 최고의 차인으로 이끈 시발점이었다면 중국에서 맛본 중국차와의 인연은 그를 본격적인 차 연구가이자 차 문화 운동가로 이끌었다.

와세다 대학에서 토목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금당은 조선 총독부의 토목기사가 되었고 지금도 부산의 명물로 남아있는 영도다리의 설계에 참여하는 등 본격적인 사회인으로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1924년부터 1930년까지의 기간 동안 금당은 고려의 역사서를 통해 우리의 차 문화가 얼마나 융성했었던가를 알고 되었고 전라도 지방과 사찰에 차와 관련된 전통이 여전히 남아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주, 강진, 해남 등지에 야생 차나무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이렇게 우리 차 문화의 맥을 찾아가던 금당이니 1930년대에 이르러 중국의 상해로 건너가 동아조(東亞朝)라는 토목회사를 세우고 사업을 하게 되는데 중국에서의 사업기간 동안 중국차와 본격적인 인연을 맺게 된다.

8년 동안 중국의 차 명산지를 두루 다니면서 차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이를 금당은 스스로의 다복(茶福)이라고 했다.

NSP통신-금당다우의 현재모습
금당다우의 현재모습

[우리차를 찾아서]

일본차와 중국차를 맛보고 1946년에 귀국한 금당은 본격적으로 우리 차의 맥을 되살리는 일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그 첫 번째 과정으로 과거의 기록들을 세밀하게 살피고 차의 산지들을 직접 찾아다니고 그 과정에서 알게 된 내용들을 기록으로 꼼꼼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금당은 우리 차 문화가 불가(佛家)의 떼어 놓을 수 없는 인연을 파악하게 되었고 그자신이 해인사 선방에서 2년간 참선수행을 하기도 했다.

토목 공학자이자 건축가이며 한편으로 차인이자 심미안을 갖춘 예술가였던 금당은 해인사의 경판고, 장경각, 퇴설당 보수공사에 참여했고 1963년부터는 부산에 고려민예사를 설립하고 고미술과 민예품에 대한 연구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1978년부터는 본격적인 차 문화 확산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금당차회를 결성하여 차 문화 교육을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같은 해에 '금당다화'를 펴내 우리 문화계 전반에 충격파를 던졌다.

1983년에는 한국차인연합회의 고문을 맡아 우리차 문화의 확산을 앞장서서 이끌었고 우리나라와 중국이 국교를 맺기도 전인 1987년부터 중국 차계와 교류를 시작했으며 같은 해에 창립된 한국차문화회의 상임고문도 맡았다.

1988년에는 한국육우다경회를 결성하여 다경의 본격적인 연구가 차 문화운동의 시작과 끝임을 천명하였고 1989년에는 중국국제차문화연구회로부터 ‘다성’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후에도 금당은 노익장을 과시하며 한국과 중국 등의 각종 차 문화 단체들을 지도하거나 이끌었고 한국이 배출한 최고의 세계적 차 문화 운동가로 추앙되기에 이르렀다.

NSP통신-수녀님들과 수업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수녀님들과 수업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금당다우와 금당의 소박한 차 생활]

금당이 남쪽의 항구도시 부산에 세운 거처이자 다실이 금당다우(錦堂茶偶)다.

국내는 물론 일본과 중국에서 찾아온 그의 다우(茶友)들이 문턱을 닳게 했던 이집은 송도의 아름다운 해변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자리 잡고 있으며 지금은 유치원꼬마들이 이 아름다운 한옥에서 내일의 희망을 키우고 있다.

육우가 제창한 정행검덕(精行儉德)의 차 정신을 바탕으로 삼고 그 스스로 터득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차 생활을 모토로 삼던 금당은 사실 많은 유품을 남기지 않았다.

민예사를 세우고 운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물급 문화재를 남겼다거나 값비싼 다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후배차인들이 결코 버릴 수 없는 정신적 유산들을 물려주었다.

소박하고 겸손하며 조용하고 차분한 차생활의 지침이 하나이며 차가 모든 국민들의 일상 음료가 되지 않는 한 진정한 문화라고 할 수 없다며 차 문화 운동을 확산을 주문한 가르침이 다른 하나이다.

이 둘만 잊지 않는다고 해도 너끈히 훌륭한 차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으리라.

[금당의 저술과 상훈]

‘금당다화’ ‘현대인과 차’ 중국 차 문화 번역서인 허차서(許次紓)의 ‘다소(茶疏)’ 그리고 ‘중국차문화기행’등이 있으며 2004년에 선고다인총서란 이름으로 다시 재출간한 ‘금당다화’가 있다.

또 자필로 쓴 ‘동다송(東茶頌)’ 원문 글씨 등이 남아있다.

1993년 한국최고의 차문화상인 초의(草衣) 학술상을 수상했다.

1996년 명원(茗圓) 학술상도 받았다.

매년 봄에 금당다비(錦堂茶碑)가 있는 부산 구덕문화공원에서 한국육우다경연구회, 금당차문화회의 문도들과 전국의 차 문화 인들에 의해 ‘금당선생추모헌다식’이 치러진다.

(사)부산차문화진흥원에서도 매년 선고(先考)다인 헌다의식에 금당 최규용을 추모하고 있다.

그리고 ‘금당차인기념사업회’가 곧 창립될 예정이다.

글 = 김환기 객원기자
사진 = 김학용

최상훈 NSP통신 기자, captaincsh@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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