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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의 눈물, 히메유리 전장 속에 사라진 십대 소녀들의 죽음

NSP통신, 권민수 기자, 2018-11-05 15:41 KRD2
#경주시 #오키나와 #히메유리 탑 #오키나와 자살절벽

오키나와 자살절벽, 일본제국주의의 오키나와 주민 ‘자살’ 강요... 오키나와 주민과 조선인, 5000여명 떨어져 숨져

NSP통신-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자살절벽의 모습. (권민수 기자)
오키나와 평화기념공원에 있는 자살절벽의 모습. (권민수 기자)

(경북=NSP통신) 권민수 기자 = 일본 오키나와 현은 따뜻한 기온과 풍요로운 에메랄드 빛 바다, 광활한 태평양의 품속에서 음악과 전통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이 섬의 사람들은 자주 빛 바다의 깊이만큼 깊은 슬픔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오키나와현은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교역하며 풍요로운 바다와 평화와 우호를 중요시하던 ‘류큐왕부’가 지배하던 곳이다. 그러나 일본 메이지 정부의 ‘류큐처분’을 통해 ‘황민화정책’에 따라 일본화가 진행되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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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역사의 아픔 속에 겹쳐 일본제국주의의 종식을 알린 1945년 아시아 태평양전쟁은 주민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을 남겼다.

1945년 6월 23일은 오키나와전투 종전을 기념해 오키나와현이 제정한 ‘위령의 날’이다. 이날은 오키나와현이 지정한 공휴일로 올해로 73주년을 맞이한다. 1945년 6월 23일은 일본군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치루 등 사령부가 폐전이 확실해지자 마부니의 군사령부에서 자결한 날이다.

오키나와 전투의 종지부를 찍은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 전투로 약 21만명의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그 중에서 조선인 1만여명도 강제 징용되어 같이 희생되었다.

일본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는 전쟁의 상흔이 그대로 자연에 새겨져 있는 대표적인 곳이 오키나와 평화공원에 있는 일명 ‘자살절벽’과 히메유리 평화기념공원의 ‘히메유리 탑’이다.

이 곳에서 미군에 의해 섬이 점령되자 일본군은 주민들과 일본군들에게 자결을 명령한다. 자발적으로 뛰어 내린 사람들과 일본군에 밀려 절벽에 떨어진 오키나와 주민, 조선인 등이 약 5000명에 달한다고 한다.

일본제국주의의 만행과 전쟁의 참담함이 거센 파도에 밀려와 하얀 희생자들의 한이 포말처럼 절벽에서 부딪쳐 흩어지고 있었다.

NSP통신-오키나와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에 희생자 240명이 사진이 걸려있다. (권민수 기자)
오키나와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에 희생자 240명이 사진이 걸려있다. (권민수 기자)

전쟁의 거대한 폭력은 일본 자국민들에게도 자행되었다. 같은 지역에 있는 히메유리 평화기념자료관의 벽면에는 오키나와 사범학교 여자부와 오키나와 현립 제1 고등여학교의 학생, 교사 18명 총 240명의 희생자의 사진이 걸려있다.

이들은 1945년 늦은 밤. 이들은 나하시의 남동쪽 5km에 있는 하에바루에 있던 육군 병원에 배속되었다. 3월 26일 미군이 게라마 열도에 진격,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의 중부서해안에 상륙하자 일본군의 사상자가 급증했다. 학생들은 후송되어온 부상병의 간호와 물긷기, 밥짓기, 시신 매장에 동원되어 잠 잘 시간도 없었다고 한다.

5월 하순 미군의 공격이 가속화 되자 일본군과 학생들은 본섬 남단으로 이동했다. 미군의 격렬한 포격이 계속되는 가운데 6월 18일 일본군은 갑작스런 ‘해산명령’을 학생들에게 내린다.

이미 포위된 지역에서 여학생들은 포화 속에 도망가다가 포탄, 가스탄에, 또는 수류탄으로 자살한다. 육군병원에 동원된 교사와 학생 총 240명 중에 136명이 죽고 재향부대 등에게 91명이 학살을 당했다.

그중 히메유리 탑이 있는 제3외과호의 학도대는 19일 아침, 백린탄 등의 공격에 호안에서 96명중 87명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난 곳이다. 희생자는 14세에서 17세의 소녀들이 대부분 이었다. 히메유리 학도대 외에도 오키나와에서 총 1998명의 학생이 희생되었다.

NSP통신-제3외과호의 학도대 87명이 사망한 동굴에 히메유리 탑이 세워져 있다. (권민수 기자)
제3외과호의 학도대 87명이 사망한 동굴에 히메유리 탑이 세워져 있다. (권민수 기자)

이러한 일이 발생한 근본적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의 천황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전체주의를 중요시하는 교육에 의한 개인의 희생을 강요한 교육이 저변에 깔려 있다. 그 결과 자살을 강요당한 어린 여학생들이 희생되었다.

일본제국주의 침략 전쟁은 자신들의 딸들조차 하얀 눈물로 피워진 향기 없는 벚꽃이 되어 사라지게 했다.

오사카에서 온 일본여성 A 씨는“일본은 패전국이다. 패전국의 국민들은 자국과 미군에게 수많은 강요를 당했다. 아직도 그 상처의 아픔은 진행형이다. 그러나 그 아픔이 자식들에게 전해지지 않아 감사하다”며 “이미 일본은 부자다. 여성들의 권리가 지켜지고 있다. 전쟁의 아픔을 잊지 않고 평화를 위해 일본인들은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 나의 할아버지도 전쟁에서 희생되었다. 일본인들은 누구보다 전쟁의 무서움과 참담함을 잘 알고 있다. 더 이상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오키나와는 미군기지의 70% 이상과 일본 자위대가 위치해 있어 현재도 전쟁의 전진 기지로 이용되고 있다. 이러한 아픔과 현실속에서 오키나와 현은 중국인과 한국인들의 관광객들이 매년 수천명 방문해 관광도시로 자리잡고 있다.

또한 이 곳은 일본 중, 고등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유명하다. 전쟁에 대한 간접체험과 평화의 중요성을 교육하고 있는 현장 체험형 교육 관광지로, 매년 수 많은 학교의 학생들이 방문하고 있다.

NSP통신/NSP TV 권민수 기자, kwun5104@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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