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P통신 류수운 기자] 연기경력 20년차 지대한(41)은 이름없는 배우다. 그래서 혹자는 그를 ‘그림자 배우’로 칭한다.
지난 1988년 KBS 6.25 특집극 6부작 <지리산>에 첫 단역으로 출연하면서 연기자의 길로 접어 들어선 지대한은 영화와 드라마 등 수 많은 작품속에 등장해 왔지만 그의 이름 석자 ‘지·대·한’을 기억하는 대중들은 흔치 않다.
그는<쉬리>,<주유소 습격사건>,<친구>,<파이란>,<두사부일체>,<올드보이>,<투가이즈>,<해바라기>,<무방비 도시>,<유감스러운 도시>,<해운대> 등 40 여편의 영화와 범죄 수사극인 MBC <경찰청 사람들>, KBS <전설의 고향>과<천추태후>, MBC <돌아온 일지매> 등 드라마 작품을 해왔지만 늘 단역과 조연을 맡아 왔다.
단 한 번도 주연이라는 타이틀로 작품을 한 적이 없는 지대한. 그러나 맡은 배역은 언제나 주연을 빛나게 하는 대부분 개성강한 악역이라 대중들은 그를 지대한이 아닌 ‘배우’로 기억해낸다.
그래도 요즘들어서는 그를 지대한으로 알아주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는 드라마 <천추태후>에서 고려를 침공한 요제국 장수 ‘소손녕’으로 강한 인상과 더불어 실감나는 연기력으로 시청자들의 눈도장을 받았다.
“예전에는 길가다 사람들과 마주치면 ‘저 사람 배운데 이름은 글쎄’라는 소릴 자주 들었지만, <천추태후> 이후 ‘소손녕 역했던 지대한’이라는 소릴 종종 듣는 편입니다.”
그가 지대한이라는 이름으로 대중들에게 각인돼 가는 것은 출연작의 시청률이 높았던 탓도 있지만 그 보다 탄탄한 연기력을 보인 그에 대한 시청자의 궁금증이 지대한을 알게했기 때문이다.
◇ 명품연기 지대한에게는 ‘연기자의 혼’이 살아 있다
그의 자연스럽고 뛰어난 연기력은 스턴트맨, 엑스트라, 조연으로 늘 현장을 누비며, 실전 연기력을 다져온데서 비롯된다.
‘혼(魂)’이 살아 있는 연기를 위해 그는 단 한 장면의 출연에도 수십 아니 수백번의 연습과정을 거친다.
“나로 인해 작품의 맥이 끊긴다면 견딜 수 없는 고통일 것입니다. 작품 흐름상 어쩌면 그저 순간적으로 스쳐가는 장면일 수 있지만 관객들은 소소하지만 어설픈 장면에서 전체 작품에 대한 실망감을 크게 가질 수 있다고 봅니다. 내가 맡은 역할에서 그런 일이 생기면 안되겠지요. 그래서 완벽한 연기를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지대한의 이러한 노력은 이미 충무로 감독들에게 높은 점수를 받고 있다. 그래서 일까?. 그는 단역이든 조연이든, 우정출연이든 영화 감독들로부터 러브콜이 이어지는 배우 중 한 명이다.
이결과 지대한은 해 마다 두 작품 이상 해 왔다.
늘 주연배우들에 그늘에 가려 그림자로 그들을 지켜내 온 배우 지대한은 “주연에 대한 욕심요?. 없다면 거짓이겠죠.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며 “배우란 늘 연기를 통해 끊임없이 배우라고 있는 직업이라고 봅니다. 배우 20년이지만 아직 배울게 많습니다. 지금은 주어진 배역에 최선을 다할 뿐 다른 욕심이 없습니다”고 겸손해 한다.
그의 과거는 아픔으로 점철돼 있다.
◇ 형의 죽음, “연기 못하는 너 나가!” 감독 질책…쓰라린 아픈 과거가 ‘배우’ 지대한을 만들다
일찌기 아버님을 여의였던 지대한은 넉넉지 못한 가정형편을 고려해 항해사가 되기 위해 부산해사고에 진학했다. 당시 항해사가 되면 대기업 급료만큼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선택한 길이었다.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된 것은 학교에 학생들의 인성교육을 위해 특별활동반인 연극반이 생기면서이다.
무작정 들어간 연극반에서 그는 연기를 시작했다. 연기 지도를 하셨던 선생님이 지대한에게 “연기에 소질이 있다”고 말한게 막연한 ‘배우’의 꿈을 꾸게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배를 탄 그는 배우가되기 위해 홀로 서울로 향했고, 그의 좌절섞인 희망의 불씨는 이 때부터 시작됐다.
탤런트와 영화배우가 되기 위해 숱한 오디션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산 태생으로 20년간 부산에서 생활해 온 그에게 사투리는 큰 걸림돌이었다. 매번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무일푼의 그가 선택한 건 충무로 엑스트라였다. 박한 출연료로 근근히 생활고를 해결하려 했지만 턱없이 가난은 목을 옥죄어 왔다. 결국 낮엔 구두를 닦았고, 밤에는 극장 암표를 팔았다.
버는 돈으로 배우가 되기위해 사투리도 고치고 연기력도 키울 수 있는 연기학원을 등록했다. 물론 주위의 도움도 있었다. 우연찮게 알게된 구두닦이 형들이 그를 도왔다.
제대로 먹고 자지 못한 그에게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결핵에 걸리고 만 것.
병원 치료를 받으며 앞으로의 인생에 대한 깊은 고민을 했다. 배우의 꿈을 놓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멜로보다는 액션배우가 자신의 외모와 맞겠다는 생각하에 태권도와 특공무술을 익힐 수 있는 공수부대에 자원 입대했다.
제대 후 스턴트맨으로 활동을 시작해 <경찰청 사람들>에 자주 출연하며, 재연배우가 됐다. 물론 폼나는 형사가 아니라 나쁜짓하는 범죄자로 등장했다.
이를 기화로 당시 인기프로였던 <경찰청 사람들>,<이야기 속으로>,<사건25시> 등에 소위 ‘나쁜놈’으로 한 달에 한번꼴로 재연연기 주인공을 했다. 그러다보니 그를 실제 ‘범죄자’처럼 알아보는 사람들도 많아 길을 가든 식당에 가든 욕은 배불리 먹고 다녔다.
그러나 그에게 이 시기는 소중한 시절로 기억된다. 인상깊은 연기로 충무로 영화에 본격적으로 활동할 기회가 많아졌기 때문.
비록 단역이지만 배우로서의 꿈을 조금씩 이뤄가던 그에게 배우의 길을 선택한 것에 대한 후회를 낳은 두 번의 사건은 그의 눈시울을 적실만큼 아픈 과거다.
“5년전 쯤 두 번의 큰 계기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심형래 감독의 영화 <파워킹>에 가면을 쓴 외계인으로 출연해 촬영할 당시 집안 가장이신 형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촬영중이라 내려갈 수도 없고 해서 가면안에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배우’가 되겠다고 고집부리는 내 모습이 얼마나 못나 보이던지 실망하면서 후회했죠. 또 한번은 영화 <꼬리치는 남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됐는데 연기가 안된다고 감독한테 ‘얘 누가데려왔어’, ‘그만둬’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 때 출연료도 깎이고 정말 미치겠더군요. 촬영을 마치고 혼자 바닷가에 앉아 청승떨며 소주를 마시는데 눈에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배우 고만둘까라는 생각도 들고요. 하지만 그 계기로 ‘그래 끝까지 해보자’라는 오기가 생겨 지금까지 배우 생활을 하고 있죠.”
지대한은 이 때를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추억이라고 했다.
◇ ‘열렬한 팬’ 어머니 그리고 아내와 두 아이에게 미안한 가장…롤 모델 배우 최민식
최고의 팬이 누구냐는 질문에 그는 서슴지 않고 어머니라 말한다.
“배우가 되겠다고 했을 때 어머니는 완강히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연배우는 아니지만 많은 작품에 출연하는 저를 보며 흐뭇해하시고, 동네분들에게 내가 나오는 작품은 다 소개하면서 자랑하십니다. 저의 열렬한 팬이시지요.(웃음)”
조덕현, 최민식, 김수로, 유태웅 등 배우들과 친분이 깊은 지대한은 “(최)민식이 형 같은 배우가 되고 싶습니다. 연기도 그렇지만 민식이 형의 다정다감한 배려심을 빼닮고 싶어요. 영화 <올드보이>에서 민식이 형의 친구역을 맡았던 적이 있습니다. 20년 만에 만나 재회하는 신을 찍어야 하는데 대사를 하며 반갑게 형을 끌어 안았습니다. 감독님은 이런 제 행동이 거슬렸나 봅니다. 몇 번의 NG가 이어지고 급기야 감독님은 화를 내셨습니다. 당황스러웠죠. 나는 잘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 때 형이 내게 눈짓을 하더라구요. ‘20년만에 만난 친구인데 대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냐. 뜨겁게 포옹하는 것 만으로 모든걸 다 표현해낼 수 있지’라고 말하는것 같았어요. 이어진 촬영에서 저는 형을 힘있게 꼭 끌어안았습니다. 결과는 단 한 번에 ‘OK’였습니다”라며 “민식이 형은 다른 주연배우들과 달리 조연이나 단역이 실수로 몇 번의 같은 장면을 찍게되더라도 절대 짜증내지 않고 웃으면서 잘하라고 격려부터 해줍니다. 이런 모습이 너무 멋져보이지 않나요?. 꼭 저도 민식이 형 같은 배우가 되려 합니다”라고 자신의 롤모델로 최민식을 꼽는 이유를 설명했다.
‘배테랑 연기자’, ‘명품조연’, ‘성실한 배우’, ‘개성파 연기자’ 등 수 많은 수식어가 따라붙은 지대한.
배우의 꿈을 차근차근 이루어가고 있다는 그는 가장으로서 물질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게 가슴이 짠하다고 한다.
결혼 11년차가 된 그에게는 힘든 그것도 아직은 배고픈 배우를 위해 내조에 헌신하는 아내와 아빠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은 열 살, 여섯살 된 두 아이가 있다.
그는 아직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늘 연기할 수 있는 극단과 촬영장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그를 만난 곳도 그가 속한 극단 유시어터다.
지난해 연기를 더욱 체계적으로 배우려는 의지를 담아 지대한은 대진대학교 연극영화과에 09학번으로 입학했다.
‘배움이 즐겁다’는 지대한에게 배우는 살아가는 목적이며, 희망이다.
늘 작품속에서 강렬한 배역이지만 튀지 않는 연기로 배역에 최선을 다해 온 ‘꿈꾸는 배우’ 지대한은 “작품과 주연배우들을 위해서라면 배역에 관계없이 혼신의 연기를 다 할 생각입니다”며 “저는 꿈을 이룬 배우입니다. 배우로서의 삶을 살고 있다는 지금 너무나 행복합니다”고 웃음져 보인다.
“생명의 끈을 놓을 때까지 배우로서 살려고 합니다. 작품도 꾸준히 할 생각이고요. 여유와 기회가 생긴다면 후학양성에도 힘을 쏟을 계획입니다. 그들에게 연기할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할 수 있도록 극장 또는 극단을 세우거나, 배우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는 매니지먼트 등의 일을 하고 싶습니다.”
모든 사물에 그림자가 드리워질 때 그 사물은 생명력을 갖게된다. ‘그림자 배우’ 지대한이 있어 그가 출연하는 작품은 살아 숨쉬는 듯 하다.
현재 개봉을 앞둔 <꿈은 이루어진다>와 이미 캐스팅을 확정해 놓은 영화 <100%>와<입춘대길>이 벌써부터 기대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사진=IR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정유석
DIP통신 류수운 기자, swryu64@dipt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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