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종선 칼럼
법규상 안전기준 과신한 현대·기아차의 미국 도난 사태가 주는 교훈(서울=NSP통신) = 이모빌라이저(Immobilizer)는 자동차 키에 특수암호가 내장된 칩을 넣어서 시동을 걸 때 자동차시스템이 이 특수암호를 인식하는 경우에만 시동이 걸리게 하는 도난 방지 장치다.
그동안 미국에서 이모빌라이저 장착 후 자동차 도난율이 대폭 떨어졌다는 것은 자동차 업계에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에 따라 자동차회사들은 이모빌라이저의 장착을 대폭 늘려 갔지만 유독 현대차와 기아차만은 이모빌라이저를 기본사양(Standard Equipment)으로 확대하지 않고 고급 트림에서만 이모빌라이저 장착을 고수했다.
미국에서 판매됐던 2000년식 모든 차종의 모델 중 62%에 이모빌라이저가 장착됐다. 이는 점차 확대 돼 2015년식에서는 이모빌라이저가 여타 자동차 제조사들 차량들에 96% 장착됐으나 현대차와 기아차에는 단지 26%에 그쳤다.
현대차와 기아차가 이모빌라이저를 기본사양으로 장착하지 않았던 이유는 도난 방지 장치에 관한 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기준 FMVSS(Federal Motor Vehicle Safety Standard) 114가 반드시 이모빌라이저를 달아야 한다고 강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캐나다는 이모빌라이저를 반드시 달도록 법규상 안전기준이 의무화돼 있어 현대차와 기아차는 캐나다에서는 이모빌라이저를 기본사양으로 장착했다.
과연 법규상 안전기준이 이모빌라이저를 의무화하고 있지 않은 미국에서는 이를 장착하지 않아도 현대차와 기아차는 아무런 법적책임을 지지 않는 것인가?
현대차와 기아차가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의 압도적 장착 확대 트렌드와 달리 이모빌라이저를 기본사양으로 확대하지 않았던 것은 납득 하기 어려운 선택이다.
왜냐하면 미국에서 안전장치(Safety Device)의 장착과 관련해 자동차 업계의 장착 확대 트렌드에 반하는 선택을 하는 것은 사고 발생시 책임을 지게 될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결정이기 때문이다.
미국 제조물책임(PL, Product Liability)과 관련한 필수적 주의사항 중 하나는 다수의 자동차 제조사가 채택하고 있는 안전장치를 나 홀로 채택하지 않으면 향후 소송에서 설계결함으로 인정되고 징벌적 손해배상책임까지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법규상 안전기준이 특정 안전장치의 장착을 의무화(Mandatory)하고 있지 않더라도 법규는 안전에 관한 최소한의 요건(Minimum Requirement)이므로 다른 자동차 제조사들이 이를 장착하기 시작했다면 이와 같은 장착 확대 트렌드를 따라 가야 한다는 것이 자동차업계의 상식이다.
대표적인 예가 자동차 전복을 방지하는 전자식 주행안정성제어장치(ESC)와 자동브레이크인 자동긴급제동장치(AEB)다. 미국 연방 자동차 안전기준(FMVSS, Federal Motor Vehicle Safety Standard)이 이들의 장착을 의무화하기도 전에 일부 자동차 회사들이 장착하기 시작하자 이와 같은 트렌드를 따라 나머지 회사들도 법규제정 이전에 이를 좇아 갔었다.
현대차는 도난사태가 확대되자 2021.11.1.에야 미국에서 판매되는 신차 전부에 Immobilizer를 장착하기로 했고, 기아차는 2022년식 모델부터 이를 장착하기로 했다. 이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의 너무나 늦은 결정이라고 보여진다.
그리고, 2021년 10대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틱톡등 소셜미디어에서 '기아차 훔치기' 챌린지가 유행처럼 번지게 되었음에도 현대차와 기아차가 즉시 안전 리콜을 실시하지 않은 결정도 과연 올바른 선택이었나 의심된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리콜 대신 서비스캠페인으로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실시했지만 미국에서 도난에 취약하다고 알려진 약 800만 대 중 소프트웨어 업그레이드를 받은 차량은 약 7%에 불과하고 이들 차량마저 도난되고 있어 그 실효성이 의심되고 있다.
뉴욕주 등 17개 주 검찰총장들은 미국 연방도로교통안전청(NHTSA)에 서한을 보내 리콜을 실시할 것을 촉구하고 있어 향후 미국 당국이 강제리콜 명령을 내릴 가능성도 있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올해 5월 중순 피해를 본 차량 소유자들이 제기한 집단소송(Class Action)을 해결하기 위해 2억 달러(약 2900억원)를 지불키로 합의했다.
그리고 밀워키시, 시애틀시, 뉴욕시 등 다수의 시들이 현대차와 기아차의 도난이 급증해 시민들의 안전에 피해가 발생하고 재정지출이 증가했으므로 공적 불법 방해(Public Nuisance)를 규정한 시 조례 위반에 대해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해서 진행 중이다.
또 최근에는 현대차와 기아차의 도난 피해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한 70여 개 보험회사들이 구상권을 행사하는 집단소송을 제기했는데 이 회사들의 추산으로는 구상금액이 6억 달러(약 7800억 원 상당)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현대차와 기아차는 미국에서 법규상 장착이 의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모빌라이저의 장착을 확대하지 않고 기본사양으로 채택하지 않은 결정으로 인하여 약 1조 원 이상의 배상금을 지불 해야 할지도 모를 처지에 놓였다.
이와 같이 다소 어처구니없는 사태는 우리나라 자동차 업계와 사회에 만연한 ‘법규상 의무가 아닌 안전장치는 장착할 필요가 없다’, ‘안전장치는 기본사양이 아닌 옵션으로 달아도 된다’는 잘못된 마인드가 초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번 현대차와 기아차의 도난 사태를 값비싼 교훈으로 삼아 미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법규가 의무화하고 있지 않은 급발진 방지 장치들과 같은 안전장치들이 선도적으로 장착돼 소비자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고 동시에 우리 자동차 제조사들의 안전 경쟁력도 향상되기를 기대한다.
ⓒ한국의 경제뉴스통신사 NSP통신·NSP TV.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