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용복의살아있으라사랑하라(19)
‘낭만 음악 춤 열정’ 넘치는 사회주의 ‘쿠바’[부산=NSP통신] 김연화 기자 = 올해 초 콜롬비아 아마존을 갔을 때였다. 콜롬비아와 브라질의 국경마을 레티시아에서 원주민 가이드를 따라 배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꼬박 하루가 걸려 아마존 오지마을 베르완노에 도착했다.
짙은 밀림에 둘러싸인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만큼이나 사람들도 좋은 인디헤나 마을. 낡은 판잣집 벽면에 붙어 있는 한 장의 사진이 눈길을 끌었다. 체 게바라.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문명을 접하기도 어려운 이곳에도 중남미의 혁명영웅 체 게바라는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혁명가 체 게바라의 나라, 낭만적인 음악이 있고 정열적인 춤이 있는 나라, 세계 몇 안 되는 사회주의국가이지만 국민들이 행복한 나라, 바로 중남미의 보석 쿠바다.
쿠바는 ‘서인도제도의 진주’라고 불릴 만큼 널리 알려진 동경의 섬이다. 1940년대만 해도 미국과 서구 상류사회에서 최고로 치는 휴양지였다.
여성의 히치하이킹이 흔한 나라
비행기에서 내리자 내리쬐는 햇살에 숨이 턱 막힌다. 찜질방에 들어온 듯 열기가 이글대지만 그늘로 들어서면 금세 땀이 마른다. 더위 때문인지, 삶에 찌든 탓인지 사람들은 표정이 없지만 눈망울만은 더할 나위 없이 맑다.
시내로 이동하는 차안에서 바라본 쿠바섬은 사회주의 국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만큼 자유로움이 넘친다. 말레콘 방파제를 따라 담소를 나누는 젊은이들과 사랑을 나누는 연인들이 눈에 들어온다. 드문드문 젊은 여성들이 지나가는 차를 향해 손짓을 한다. 정류장도 아니고 택시가 다니는 것도 아니다.
“저분들은 왜 저기 서 있는 겁니까?”라고 기사에게 묻자, “차를 태워달라는 겁니다.”라고 대답한다. 쿠바 여성들은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히치하이킹을 하기도 하는데, 그들을 태워주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란다. 우리나라에선 여성이 모르는 사람 차를 탄다는 것이 두려운 일인데, 사회주의국가 쿠바에서 이런 문화를 볼 수 있다는 것에 또 한 번 놀랐다.
쿠바여행은 수도 아바나에서 시작한다. 이곳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멋이 가득한 쿠바의 택시들이 번쩍인다. 아바나의 첫 번째 관광명소는 센트로 아바나에 있는 건물 ‘까삐똘리오’다. 아바나의 랜드마크인 이 ‘까삐똘리오’는 쿠바혁명 이전,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하던 건물인데 지금은 쿠바 국립과학원으로 사용 중이다. 인기 명소답게 까삐똘리오 앞은 여행객들을 위한 다양한 탈 것들이 대기하고 있다.
혁명 영웅 체 게바라와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
시보네족, 타이노족 등 5만여 원주민들이 고도의 농경생활에 종사하며 평화롭게 살고 있던 쿠바 섬은 16세기 초에 에스파냐에 정복된 이후 약 4세기 동안 그 지배를 받아오다 19세기 말 에스파냐와 미국 사이에 전쟁이 벌어져 다시 미국 손에 넘어가게 됐다.
이에 미국의 조종을 받는 정권이 들어서며 부패와 수탈을 자행하다 바티스타 독재정권 때 이에 항거하는 게릴라들이 들고일어나 정부를 전복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그 지도자가 라틴 아메리카의 신화적인 영웅 체 게바라였다.
그는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반란에 성공한 후 카스트로에게 정권을 맡기고 다시 게릴라 활동을 지도하기 위해 중미의 밀림 속으로 떠났다. 피폐한 민중의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혁명을 택한 체 게바라는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넘었음에도 쿠바 사람들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있다.
쿠바의 명소로 알려진 세멘테리오 꼴롱 묘지로 향했다. 세계 4대 공동묘지의 하나인 이곳에는 200만 기가 넘는 묘가 들어서 있어 차를 타고도 한참을 달려야 전체를 볼 수 있을 만큼 규모가 크다. 이 묘지는 그 크기 때문에 4대 공동묘지의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너무 아름답고 입이 벌어질 정도로 광활한데다 한마디로 너무 화려하기 때문이다.
쿠바 정부는 이 꼴롱묘지를 관광상품으로 만들어 입장료를 받고 있다. 바로 묘지를 장식한 예술품 못지않은 조각상들 때문인데, 그래서 사람들은 이곳을 공동묘지가 아닌 거대한 조각공원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와는 장례문화도 다르고 묘지의 모습도 달라 공동묘지라기보다는 커다란 공원에 온 듯한 느낌이다. 입구에 들어서면서 젊은 부부가 꽃다발을 들고 가기에 물어보니 시아버지의 기일이란다.
쿠바에서는 가족묘를 쓰기에 가족들의 무덤을 같이 만든다. 무덤 한 기에 5, 6개의 유골함이 있는 것이다. 부부를 따라 무덤에 도착하니 이미 남자의 삼촌이 와서 무덤을 손 보고 있었다. 대부분이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무덤은 자연적으로 부스러지기도 하는데, 그래서 이 아들은 매달 무덤을 보러 온단다. 부모를 생각하는 마음은 세상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똑같은 사랑일 것이다.
여행자들에겐 멋진 볼거리지만 가족들에겐 아련한 슬픔의 장소다. 꼴롱묘지의 조각들은 화려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조각마다 애틋한 사연이 담겨 있다고 한다. 소방관이 오기 전 불을 끄다 죽은 31명의 용감한 주민들이 조각된 것도 있고, 가슴 아픈 모자의 이야기도 담겨 있다.
쿠바의 초대 대통령 세르페데스 묘지보다 더 화려한 흑인 바텐더의 묘지. 세멘테리오 꼴롱묘지 한복판에 쿠바의 초대 대통령 세스페데스의 묘지가 있다. 바로 그 옆에 대통령 것보다 훨씬 높고 화려한 묘지가 있는데 그 주인공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바로 미국의 대문호 헤밍웨이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1950년대 초는 헤밍웨이의 전성시대였다. ‘노인과 바다’로 1953년에 퓰리처상을 받고 이듬해 노벨문학상을 받은 헤밍웨이는 툭하면 플로리다에서 쿠바 별장으로 갔다. 쿠바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헤밍웨이의 단골 술집이 아바나에 있는데 그곳이 ‘플로리디따’라는 바였다.
헤밍웨이는 종종 이 바의 구석자리에 앉아, 자신이 낚았던 고기 자랑을 하며 칵테일을 마시곤 했다. 흑인 바텐더는 헤밍웨이를 위해 칵테일 다이키리(Daiquiris)를 만들어주곤 했다.
헤밍웨이는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술을 마셨다. 늙은 흑인 바텐더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건네면서. 이 흑인 바텐더는 헤밍웨이를 위해 새로운 칵테일을 하나 개발했다. 그게 바로 다이키리다. 우리나라의 칵테일바에도 있다. 얼음을 갈아 만든 빙설에 럼과 사탕수수즙, 레몬을 넣고 만든 이 칵테일을 맛본 헤밍웨이는 그후로 이 칵테일만 마셨다.
이 소문이 나자 돈 많은 미국 관광객이 쿠바의 ‘플로리디따’에서 ‘다이키리’ 한 잔 마셔보지 못했다면 쿠바여행을 했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란 말이 생겨났다. 당연히 이 바에는 미국 부호들이 줄을 섰다. 사람들은 모두 ‘다이키리’를 개발한 흑인이 직접 만든 칵테일을 마시려 했고, 이 가난한 바텐더가 주인보다 더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 다이키리 한 잔 값은 50센트였지만 팁으로 열 배, 스무 배의 돈을 번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 흑인 바텐더가 플로리디따를 사고 그 옆에 딸린 식당까지 사버렸다. 꼴롱 공동묘지의 대통령 묘 옆에 있는 크고 화려한 무덤주인은 바로 이 흑인 바텐더다.
쿠바에 가면 꼭 가보리라 마음먹었었던 플로리디따는 분홍빛의 아담한 단층 건물이었다. 외벽 간판에는 헤밍웨이가 좋아했던 곳, ‘다이키리’ 원조라는 글이 씌어 있다. 바는 중앙에 카운터가 있고, ㄷ자 모양의 공간에 몇 개의 테이블이 놓여 있다. 집기들은 헤밍웨이가 살던 당시 그대로라고 한다. 한쪽 구석에 바에 앉아 있는 헤밍웨이의 동상이 있고, 안쪽의 두 벽면에는 헤밍웨이 관련 사진들이 수십 장 걸려 있다.
시간이 늦었던지라 손님은 많지 않았고, 재즈밴드의 공연도 막바지에 이르렀다. 헤밍웨이가 즐겼던 다이키리 한 잔 마시며 쿠바를 사랑했던 미국의 대문호가 된 양 분위기에 취해 본다. 연주하던 노래가 끝이 나자 재즈밴드의 공연이 끝났는지 악기를 주섬주섬 정리하기에 염치불구하고 ‘라쿠카라차’를 청했다. 영어도 잘하지 못하는 검은 머리 동양인의 “라쿠카라차! 플리즈~” 단 두 마디에 다시 악기를 꺼내 연주를 시작한다. 헤밍웨이가 사랑했던 것은 쿠바의 아름다운 자연이나 다이키리가 아니라 이들처럼 음악을 사랑하고 흥이 있는 쿠바 사람들이 아니었을까.
아바나 동쪽의 작은 어촌, 코히마르
쿠바를 얘기할 때 헤밍웨이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쿠바 곳곳에는 헤밍웨이의 흔적으로 넘친다. 아바나 동쪽으로 가면 작은 어촌 ‘코히마르’가 있다. 작고 조용했던 해변 이 어촌마을은 유명해지면서 커플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지만 원래는 헤밍웨이가 낚시를 즐겼던 곳이다.
이 마을에 들어섰을 때의 느낌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고요’다. 청록빛 나무길이 이어지는 마을을 지나면 확 트인 자연의 때 묻지 않은 바다가 눈에 찬다. 헤밍웨이는 이곳에서 낚시도 하고 가끔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기도 했는데, 이 코히마르의 평화로운 풍경을 보며, <노인과 바다>라는 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다운 곳이니 헤밍웨이에게 수많은 영감과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옛날 등대였을 법한 성곽은 어림잡아도 몇 십 년의 자취가 느껴진다. 이곳은 옛날부터 해안 경계를 하는 군사시설이었다고 한다.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촬영을 거부당했다. 헤밍웨이가 낚시를 즐기던 선착장에는 유명세 탓인지 언제나 많은 낚시꾼들로 붐빈다.
헤밍웨이는 1930년대부터 쿠바혁명 다음 해인 1960까지 쿠바에서 작품활동을 했다. 그 때 묵었던 호텔이나 식당이 잘 보존되어 있고 헤밍웨이가 살던 집은 박물관으로 꾸며져 있다. 박물관에는 사슴 표범가죽 호랑이 얼굴 등 집안 곳곳에 그의 취미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데 그는 낚시와 함께 사냥도 무척 즐겼다고 한다. 또 대문호답게 식당 빼고는 어떤 방을 가도 온통 책으로 가득 차 있다.
3층으로 올라가면 언제나 유유자적 놀기 좋아했던 헤밍웨이가 사용한 전망 좋은 방도 있다. 미국의 작가가 지금은 대표적 반미국가인 쿠바의 중요한 관광자원이 되어 있으니 이것도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춤과 음악의 뜨거운 열정, 아바나
아바나의 하늘에 노을이 지고 낭만적인 밤이 찾아오면 낮과는 또 다른 매력을 볼 수 있다. 밤이 되자 카페는 더욱 활기가 넘친다. 거리도 춤을 추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열정적인 아바나의 밤이다.
가게뿐 아니라 거리 어디서나 신나는 연주를 들을 수 있다. 밤이 깊어질수록 아바나는 점점 춤과 함께 뜨거워진다.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는 카페가 많고 플라멩코부터 클래식 연주까지 취향대로 골라서 갈 수 있다. 쿠바의 낮과 밤을 겪어보면 헤밍웨이가 사랑한 나라 쿠바, 춤과 음악의 뜨거운 열정이 끓는 나라 쿠바를 왜 카리브해의 진주라 부르는지 제대로 알 수 있다.
김연화 NSP통신 기자, yeonhwa0802@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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