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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 독재정치가 매스미디어와 결혼할 때

NSP통신, 박정환, 2012-04-02 21:25 KRD5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NSP통신

[서울=NSP통신] 박정환 = 수잔 콜린스의 소설 <헝거게임>의 저력은 놀랍기 그지없다. 뉴욕 타임즈에서는 장장 3년 이상이나 베스트셀러로 등극한 작품이며, 북미의 10대라면 껌뻑 죽는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원작자인 스테프니 메이어마저 <헝거게임>을 읽느라 며칠 밤을 꼬박 새게 만들 정도니 말이다.

하나 아무리 원작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소설을 스크린으로 옮기는 데 있어 내공이 부족한 장인이라면 영화는 소설의 아우라를 갉아먹을 게다. 하나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앞에서는 쓸데없는 기우다. 두 번이나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올랐던 게리 로스가 메가폰을 잡은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진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이 기록한 북미 오프닝 성적이 <해리 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와<다크 나이트>에 이어 역대 3위라는 데에 필자는 반신반의했지만 그 결과물을 언론시사로 잡하고 나니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북아메리카에서 펼쳐지는 디스토피아의 세계다. 독재국가 ‘판엠’, 외양적으로는 ‘판엠’의 최첨단 문명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 이 혜택은 지배 계급만 누릴 수 있는 혜택이다. 식민지에는 문명의 혜택 대신에 ‘형벌’이 태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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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식민지 거주자의 자녀 가운데서 24명의 소년과 소녀를 추첨하여 ‘헝거게임’을 펼치기 때문이다.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이에게는 평생 누릴 만큼의 부와 명예가 주어지지만 나머지 23명은 극락행 열차를 타야만 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죽어야 한다. 상대방이 탈수증을 일으키거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자연사 해준다면 고맙지만 내가 상대방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대방이 나를 죽이려 달려든다.

독재정치가 매스미디어와 결혼할 때

‘판엠’은 왜 이렇게 잔인한 ‘헝거게임’을, 그것도 리얼리티 TV쇼의 형식으로 매년 진행하는가? 첫째는 식민지가 예전에 ‘판엠’에 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판엠’에 대항하여 혁명을 일으켰지만 실패한다. ‘판엠’은 이에 대한 괘씸죄를 적용해서 이들의 아들 딸을 서로 죽이게 만드는 ‘헝거게임’을 창시한다. ‘헝거게임’은 독재에 대항하는 세력에게는 ‘헝거게임’에 참여하는 어린 아들 딸들처럼 비참한 말로를 면하지 못하리라는 ‘영상 경고’다.

두 번째는 독재에 유용한 것이 매스미디어라는 것을 ‘판엠’의 통치자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옛 콜로세움에서 검투사들이 벌이는 피 터지는 싸움을 즐긴 사람은 로마사람들이다. 이들이 콜로세움에서 즐긴 검투는 피와 살이 튀기는 스펙터클의 향유라는 차원 이전에 다른 목적이 있다. 귀족이 평민을 달래기 위한 목적 말이다. 눈으로는 검투사들의 살육을 즐기게 만들면서 경기장에서 제공받은 빵을 맛있게 먹이는 콜로세움의 눈요깃거리는, 겉으로는 시각적 엔터테인먼트를 제공하면서 속으로는 민심을 달래기 위한 효율적인 전략 체계다.

또 하나, 스포츠를 비하할 의도는 없지만 제 5공화국 당시에 유독 씨름이나 프로야구 창단과 같은 스포츠 열풍이 왜 봇물 터지듯 쏟아졌겠는가. 국민의 민주화 열기를 스포츠로 분산시키기 위한 고도의 통치술 아니던가.

‘판엠’의 통치자도 마찬가지다. 옛 식민지에는 반란에 대한 ‘형벌’을 제공한다. 동시에 ‘헝거게임’이라는 형벌에 리얼리티 TV쇼라는 포맷을 입힘으로 식민지의 민심 이반을 차단한다. ‘헝거게임’에 참여하는 십대들은 ‘예비 희생자’면서 동시에 ‘엔터테이너’가 된다. ‘헝거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은 엄연히 ‘예비 희생자’다. 게임이 시작하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살아 돌아올 확률이 24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죽은 목숨이다.

그런데 ‘헝거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이 캐피톨Capitol에 들어서는 장면은 <벤허>에서 벤허가 아리우스와 함께 로마에 입성하는 것과 같은 장엄함을 보여준다. 어떤 이는 로마 장군의 차림을 하고 등장하고 주인공인 캣니스(제니퍼 로렌스)는 화려한 불꽃 컨셉의 블랙 수트로 ‘캐피톨’ 시민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토크쇼도 마찬가지다. 참가자들을 한 명 한 명 일일이 소개하며 인터뷰를 진행한다. 게임의 참가자들은 그냥 참가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일리스트에 의해 아름다운 화장과 세련된 옷차림으로 등장한다. 토크쇼의 사회자는 참가자들에게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자극적인 답변을 유도하며 생존 경쟁에 대한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이뿐만이 아니다. 본 게임에 들어가면 수십, 아니 수백 대의 무인카메라가 참가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생중계한다. 참혹한 살육은 ‘캐피톨’ 시민에게 뿐만 아니라 식민지 사람들에게도 생중계된다. 혹 어느 참가자가 일부러 살육을 피하려고 도망치기라도 한다면 시청자도 지루해진다. 이 때 제작진은 살육을 피하려는 참가자가 더 이상 피해다니지 못하도록 그가 숨어있는 곳에 불세례를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식민지 사람들의 반란 의지를 무마할 목적으로 제공하는 ‘헝거게임’ 생중계는 때론 독재자에게 독이 되기도 한다. 주인공 캣니스는 다른 참가자들보다 시청자들에게 어필한다. 다른 참가자들보다 인간성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애쓰는 캣니스에게 식민지 시청자들은 감정이입한다, 만일 캣니스가 죽기라도 한다면 폭동이라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독재에 대항하는 이에게는 처참한 죽음밖엔 없을 것이라는, 공포효과를 기대하는 독재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식민지 사람들의 감정이입은 독재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독이 되기도 한다.

관람 포인트에 있어 ‘해리 포터’나 ‘나니아 연대기’와 같은 판타지를 기대하고 영화를 찾는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마법이나 초자연적 판타지가 아니라 암울한 디스토피아를 다루는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이 관객에게 감정이입할 가능성은 여느 판타지보다 높다. 현실에 근간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마법과 방어막은 보이지 않고 말하는 동물도 보이지 않다. 하지만 <헝거게임: 판엠의 불꽃>은 현실 안에서 이야기를 풀이하기에 관객과의 정서적 괴리감은 줄어든다.

더불어 캣니스라는 언더도그마가 독재의 시녀가 된 매스미디어의 엔터테이너에 머무르는 걸 거부하고 식민지 시청자로 하여금 각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매스미디어에게 포획당한 현실의 관람객에게 정신적 각성마저 알려주는 ‘계몽 판타지’로도 자리매김함을 보여준다. 매스미디어에게 포획 당함으로 독재에 항거할 의지를 잠시나마 망각했던 식민지 사람을 각성시킨 영화 속 캣니스는 현실에선 언제 즈음에나 만날 수 있을는지.

박정환 칼럼니스트

박정환 NSP통신 , js7keien@nspn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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