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광현 션킴모터스 회장을 만나다(서울=NSP통신) 김종식 기자 = 14살부터 기름밥을 먹기 시작해 32년간의 실전 실습과 연마를 통해 얻어진 노하우를 고객과 나누는 김광현 션킴모터스 회장. 이제는 젊은이들을 기술의 길과 창업의 길로, 대한민국을 복원의 세계일류 국가로 만들고 싶어하는 김광현 회장을 만나 그의 자동차복원의 기술습득과정과 노하우, 포부를 들어보자.
-자동차 복원 기술을 습득하게 된 계기는
▲저는 어릴 적 시골에서 자랐는데 먹고사는 게 힘든 형편이라 초등학교 때 부터 신문배달을 했었다. 중학교에는 학비를 낼 돈이 없어서 가지 못했으며 신문배달비로 모은 돈 6000원을 갖고 무작정 서울로 상경을 했다.
상경 후 금은방 공장에 취직해 4~5개월 일을 하던 도중 금 도난 사건이 일어났다. 제가 범인으로 몰려 구타를 당한 후 도망쳤고 두 번째로 가게된 곳은 골프장갑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두 달 정도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을 했는데 체구가 작고 왜소하단 이유로 얻어맞았고 또 결국 도망쳤다. 이후 짜장면 집에서 볶음밥을 주문해서 먹고 한 그릇을 더 주문했는데 두그릇 째 먹고 갈 곳이 없어서 앉아 있을 때 어떤 아저씨가 다가와서 어디서 왔는지를 물었다.
충청도에서 일을 하기 위해 왔다고 말 하자 아저씨가 일자리를 준다고 말해 무작정 따라서 미아리 골목으로 가게 됐는데 어버이날 조화를 찍어내는 공장이었다. 4~5시간 기다리자 또 다른 아저씨가 나왔다.
그 아저씨 차를 타고 도봉구 창동으로 갔는데 자동차가 엄청 많은 정비공장이 있었다. 취직을 하려고 하니 미성년자라서 받지를 않았다.
다행히 전무 라는 분이 저를 좋게 봐주셔서 부모님 도장을 받아오라고 동의서를 주셨고 버스를 타고 충청도로 내려가서 부모님 대신 이장님 도장을 찍어왔다. 그 이후로 자동차와의 인연이 시작됐다.
◆소년에서 정비공장 사장으로, 해외를 떠돌며 기술 습득해
처음에는 차체판금이라고 불리는 자동차가 찌그러진 것을 피는 작업을 했다. 현재 기준 차가 찌그러지면 교환을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브리샤, 포니원, 스텔라 등의 차들이 있었고 그 차 부품들이 꽤나 값이 나갔으며 귀했기 때문에 교환보다는 판금을 많이 했다.
회사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일을 했는데 아침, 저녁식사는 제공되지 않았고 점심 한끼를 줬다. 그마저도 회사 50%, 직원 50% 반반 부담이었기 때문에 월급이 당시에 8만원(초봉)이었던 저는 점심 값을 낼 돈이 없었다.
야간 일을 하면 밥을 줬기 때문에 무조건 야간 일을 도맡았다. 각 부서의 반장님들에게 판금 기술을 배웠으며 판금 기술을 몇 년 배우다 보니 도장 일을 배우고 싶었다. 도장 일을 하다가 반장도 해 보고 하면서 정비공장 세계를 돌아다니게 됐다.
21살때 판금반장이 됐을 때가 제일 자랑스러웠다. 20때에 반장이 된 건 제가 아마 최초였을 것이다. 20대가 돼 군대 신검에서 면제를 받은 다음에 중학교,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봐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이는 점점 먹어가는데 학벌이 좋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리기 시작하면서 그런 마음을 먹은 것 같다.
자동차 뒤에 붙어있는 마크들이 영어로 돼 있었는데 그조차도 읽지 못했다. 중학교에서 배운 영어실력이 없으니 영어를 배워보고 싶어 30대 초반에 교회 선교사를 통해 캐나다를 가게 됐다.
그 이전에 20대 중반에 자동차 정비공장 사장을 해 보고 싶어서 정비공장을 차렸는데 그때당시에는 돈도 많이 벌고 해 볼만한 게 정비공장 이었고 해외 쪽은 어떨까 하는 생각에 해외 쪽으로 발을 들여 놓게된 계기가 된 듯하다. 30대 초반에 캐나다에서 처음 배운 기술은 바디 리스토어(복원)다.
1910년식 아주 오래된 차들을 복원하는 기술로 한 대 복원하는데 2년이 걸리는데 경매로 20~25억 정도에 낙찰이 된다. 외국 대기업 회장들이 옛 차들을 아주 좋아했다. 복원을 3~4대 했다. 제 기억으로 제가 복원했던 1911년식 포드 자동차가 20억원에 낙찰 되기도 했다.
외국은 자동차 정비공장을 ‘바디샵’이라고 하는데 바디샵이 우리나라에 비해 작았다. 바디샵에서는 판금, 복원, 하도작업, 조색작업 등 여러가지 기술들을 갖고 있다 보니까 시간당 95 캐나다달러(9만원)를 받아봤다. 한국 사람으로는 최초일 것이다.
외국 고객의 경우 본인의 차를 맡아본 기술자가 휴가를 가면 휴가를 다녀올 때 까지 기다린다. 외국은 내 차를 얼마나 만져 본 사람인가, 내가 신뢰할 수 있는가 로 판단을 하는 반면에 한국 고객들은 그런게 없다. 다른곳에 가서 고치거나 싸면 고친다. 캐나다에서는 5년 정도 지냈다.
이후 한국에 36살에 수원에 와 정비공장을 차리게 됐고 상상도 못할 만큼 많은 돈을 벌었지만 한국의 다람쥐 쳇바퀴 돌듯 틀에 박혀 있는 시장이 싫어서 관뒀다.
◆큰손 사업가에서 다시 빈 털털이로
해외에 제 이름으로 된 션킴모터스 프랜차이즈 10개를 열겠다는 포부로 필리핀을 갔으나 큰돈을 잃고 사업을 열기도전에 망했다. 완전히 폐가망신을 했고 이후 필리핀에서 자동차 정비 외형복원을 가르치는 강사로 연봉을 9000만원 받고 일했다.
필리핀 인건비가 너무 저렴하고 차 고치는 비용도 너무 저렴했다. 예를 들어 본인이 10만원에 도색을 해 준다면 뒷골목에서는 2만원에 해주는 불법도 많았다. 그래서 결국 3년 9개월 정도 필리핀에 있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다.
한국에서 사업을 하려다가 일본에서 기술자를 필요로 한다는 말을 듣고 무턱대고 39살쯤 일본으로 가게 됐다. 기술력으로 굉장히 무시를 많이 당했으나 인사도 잘 하고 잘 웃으며 매너있게 지냈다.
마쯔가와 라는 분이 저를 예뻐해 주시고 기술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분은 4대째 장인이었으며 폴리싱(광택을 내는것)의 마스터였다. 일본어는 영어보다 쉬운 편이어서 24부작 일본드라마를 통째로 50여 번 반복해 보면서 일본회화를 익혔다.
반면 글은 쓸 줄 몰라서 일본에서 마스터 자격증을 따야 했는데 낭패였다. 마쯔가와 라는 분을 3년간 쫓아다녔는데 마쯔가와가 츠쿠바대 공업기술대학교를 3년간 다니라고 했다. 추천서를 받고 무작정 대학교에 들어갔다.
일어 대화는 가능한데 쓰는게 불가능했던 저는 마쯔가와의 도움으로 필기를 패스하고 15시간 동안 실기시험을 봤고 감독관들이 all A를 줬다. 정식 라이센스는 받지 못했으나 도요타에서 인증하는 폴리싱 인증서를 받았다.
◆기술력과 교육의 스킬을 얻다
일본생활을 하다 보니 한국이 그리워져 4년 정도 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귀국했는데 제 수중에는 그때 당시 6만5000엔밖에 없었고 김포에서 일자리를 찾아 어느 정비업체에 들어갔고 30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인천공항에 짐을 맡겨놓고 김포에서 취직자리를 얻어 놓고 월 30만원짜리 고시원에 들어갔고 30만원이 안되는 돈으로 한 달을 버텼다. 저는 월급을 300만원 준다고 했을 때 “예 알겠습니다” 하고 들어가서 제 기술력을 다 보여준다. 보여줄 걸 다 보여주고 월급 인상을 요구하는 편이다. 첫 월급을 300만원으로 측정했지만 실제로 한달 후 받은 돈은 600만원이었다.
제 기술력을 인상 깊게 본 한 투자자가 투자를 할 테니 정비공장을 하나 차리자고 해서 정비공장을 김포 공단쪽에 차리게 됐고 3달 정도 일을 했는데 정비공장이 잘 됐다. 순 수입이 4000만원 이상 됐을 때 투자자가 욕심을 내며 시비를 걸기에 그만뒀다.
경기도 수원이 가고 싶어져 수원에 있는 자동차외형복원 교육을 하는 업체에 취업을 하게 됐고 보증금 200만원에 월 35만원짜리 방 하나를 얻었다. 월급으로 돈을 벌기엔 나가는 돈이 많아서 계속 돈이 없었다. 외형복원을 가르치는 도중에 지금 현재의 션킴모터스 부사장을 만났다.
그때 당시에 기술력이 부족했던 부사장이 저한테 기술을 배우기 위해 교육생으로 들어왔었고 4개월 정도 교육을 받은후 부사장은 부산으로 떠났다. 이후 부사장과 연락이 닿아서 부사장이 모아둔 돈이 있어 돈은 부사장이 대고 기술은 제가 대는 방식으로 70평짜리 외형복원샵을 차리게 됐다.
일이 아주 힘들었다. 정비공장 토탈케어 샵을 크게 차리고 싶었기 때문에 부사장과 고생을 하면서 열심히 일했다. 1년의 고생 끝에 120평 되는 권선동에 위치한 션킴모터스 공장을 인수하게 됐다. 하지만 외형복원샵과 공장 위치가 떨어져 있다 보니 일이 진행이 잘 안됐다.
토탈케어를 꼭 만들어야겠다 싶어서 직원, 식구들과 같이 1년만 더 고생하자며 1년간 정말 열심히 일했다. 1년을 또 목표를 위해서 달렸다. 일을 잘 하다 보니 고객들은 2000~3000명 계속 늘어나 또 1년을 열심히 일해서 300평 부지에 지금의 션킴모터스를 만들게 됐다.
여기서는 자동차 판금, 덴트, 광택, 도색, 열처리 등 다 할 수 있다. 열처리 부스가 2개나 돼 고객과의 약속을 다 지킬 여건이 됐으며 법적으로 허가사항이 안 되는 것도 없다.
한국에 돌아와 자동차 외형복원 교육사업을 하는 회사에서 교육부장으로 잠깐 일했는데 수원과학대학교 자동차학과 학생 몇 명이 교육생으로 들어왔고 이후 학생들 덕분에 수원과학대학교 자동차학과 교수님들과 인연이 닿았다. 어느날 수원과학대학교 자동차학과 학과장님과 교수님 두 분이 저희 사업장에 찾아오셨다.
이론적으로 석사, 박사를 받으신 분들이라 현장 경험이 많지 않아 실질적 기술은 조금 교육하시기가 어려웠는데 저를 보시고는 자동차학과에 와서 기술을 가르치길 제안하셨고 그 이후로 강의를 시작하게 됐다. 강의를 하다보니 자동차학과 친구들이 100여 명이 넘는데 이론 강의가 아니라 실습이었기 때문에 제가 인기가 굉장히 좋았다.
-앞으로의 포부는
▲대학교에서 교육하며 느낀게 자동차학과로 입학한 학생들은 자동차학과 전공을 살려 사회로 나가기위해 대학에 입학을 했지만 졸업위주 목표로 변질됐다는 것이다. 교육사업 관련 일을 해야겠다고 느꼈다. 우리 션킴모터스에서 취·창업을 할 수 있는 기술을 알려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정부에서 월 80~100만원의 복원관련 학원비 보조금을 대주는데 강사진들이 최고의 기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 교육을 통해 취업이나 창업을 하기에는 많이 부족하다. 저의 꿈은 1000평정도 부지에 500평은 정비공장, 500평은 자동차 이론, 실습을 할 수 있는 자동차 전용 전문학교를 세우고 싶다.
1학년 때는 이론을 배우고 2학년 때는 그 옆의 정비공장에서 실질적으로 일을 하며 최저임금을 받게 하는 것이다. 동시에 2년이라는 경력도 쌓는 곳으로 1년에 100~200명만 정성들여 가르쳐 준다면 창업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기술은 정년퇴직이 없으며 본인이 노력한 만큼 급여를 받을 수 있어 기술이야 말로 내 인생의 연금이며 70대 때도 일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저의 목표는 기술대학이 될지 기술직업훈련학교가 될지 모르겠지만 정부에서 인가를 내준다면 오로지 자동차학과인 기술학교를 만들고 싶다. 이 학교만 졸업한다면 기본 5가지인 PPF, 덴트, 래핑, 스프레이 도색 등을 배워갈 수 있도록 말이다.
차는 점점 늘어나고 있고 도색, 외형복원은 절대 기계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자동차 분야는 망할 수가 없다.
일년에 많게는 200명 적게는 100명 정도의 학생들만 교육하고 싶다. 우리나라가 지금 자동차 생산에는 세계 최고이지만 자동차 복원에서도 독일, 일본 등에 기술이 뒤지지 않는 기술자들이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
그리고 외국처럼 본인의 차를 맡은 기술자가 휴가를 다녀와도 올때까지 기다리듯이 션킴모터스의 고객들도 기다렸다가 맡길 정도로 믿음이 가는 회사를 만들고 싶다.
김광현 션킴모터스 회장은 ▲차체판금경력32년 ▲자동차보수도장경력21년 ▲자동차광택경력7년 ▲(전) 수원과학대학교 겸임교수 ▲(현) 수원과학대학교 특강강사 ▲일본 도요타 폴리싱마스터인증서 소지 ▲캐나다 리페어페인팅 라이센스 실버 ▲캐나다 리페어페인팅 라이센스 프로 ▲한국 자동차정비기능사 ▲한국 자동차보수도장 라이센스 ▲SBS 27회 성공정석의꾼 출연 ▲2017년 스포츠서울 대상(자동차외형복원 브랜드부문) ▲2019년 MBC시사매거진2580 자동차외형복원 대상(덴트. 광택. 판금도색. 부분도색 부문) ▲(현) 션킴모터스(자동차 외형복원 전문토탈바디샵)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NSP통신 김종식 기자 jsbio1@nspna.com
저작권자ⓒ 한국의 경제뉴스통신사 NSP통신·NSP TV. 무단전재-재배포 금지.